100. Through All the Pain And the Sorrows.
다녀올게. 짧은 말 한마디 없이, 괴물은 작은 아이에게 자신의 일을 맡기고 사라졌다. 아이는 검은 안개로 사그라드는 그 뒷모습에 얼핏 손을 흔들어주었다. 구름 한 점, 달빛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망토가 온 새벽 하늘을 가린다. 뼈를 깎아 만든 지팡이 짚은 안내자가 길 잃은 자를 발견한 까닭이다.
눈 멀고 팔 잘린 이들의 절망을 먹는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취했으나 감각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가끔 바닥을 기어다니는 저 시체들과 자신의 차이점에 대해 의문을 갖곤 했다. 사람의 살점만을 바라고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죽은 자들과, 그 사이에서 무너지는 산 자들의 후회와 공포에 이끌려 자리잡는 악마의. 이성의 유무에요. 똑 부러지게 말하던 아이의 목소리는 가끔은 대답이 되지 못했다. 저 한구석 시골에선 산사태가 일어나 백여명이 갇혀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또 그 마을에서 물을 건너면 폭우로 넘쳐 흘러온 바다에 가족과 친구를 내놓은 사람들의 절규가 있었다. 절망이 스며들지 않은 곳은 없다. 그럼에도 그는 아리도록 제 손목을 잡아당기는 붉은 실 단 하나를 따랐다. 다수가 고통스러울수록 은화 쩔렁이는 소리는 더더욱 큼에도 불구하고. 산지옥에서 불타오르는 사람들이 그의 목을, 팔을, 다리를 당겼다. 살을 파고드는 실이 꼭 톱날 같다고 생각했다. 익숙했다, 집어삼켜야할 짐덩이들을 향해 괴물을 꾀어내는 감각은 언제나 필연처럼 그를 뒤따랐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는 당연히 그 안내를 따라야만했다. 배불리 탐욕을 채울 수 있는 장소로 이끌어주는데에 저항할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그가 향해 가는 곳엔 불확실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그는 동이 터 밝은 아침, 지극히 충동에 따라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마냥 깨끗이 닦인 문 앞에 섰다. 그는 어떤 실이 본능이고 이성인지 굳이 분간하러 들지는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제가 무의식을 따랐음을 알았다.
청명한 허공에 버석히 말라 가라앉은 음울을 훑어 은으로 바꾸며, 괴물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탁한 찻물에는 악마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얼굴 없는 시선이 건너편의 찻잔으로 향한다. 맑은 물에는 아래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얼핏 우울 걸린 입매, 한 쪽 뿐인 눈동자가 고스란히 반사되었다. 제 눈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다. 한 손으로 찻잔을 잡고, 그는 무던한 손길로 앉은 자리를 쓸었다. 어디선가 덜그럭거리는 소음이 들림과 동시에 창문을 뚫고 슬몃 빛 한 줄기가 더 들어섰다. 한 사람이 고스란히 쌓은 절망의 끄트머리가 작은 은덩어리로 뭉쳐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아직 입 안으로 털어넣지는 못했으나 그는 제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진득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100일. 죽은 사람이 사는 집에 머무르는 이와, 그 내음에 이끌려 온 악마가 몇 마디 되지 않은 대화 끝에 다과 접시 위에 올린 결론이었다. 질식사는 느리고 고통스럽다. 늪에 허리까지 잠겨 차라리 이르게 목을 쳐달라 부르짖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봐왔다. 꼭 빠져나오지 못할거라 여겨 마지막의 마지막에 달해서야 결국 증오스러운 전염병을 집 안으로 들이는 사람들. 사실 괴물은 그런 이에게 쉬이 자비를 베풀지 않아왔다. 살아있는 살점이 썩어 뚝뚝 떨어지는 녹이야말로 그의 먹이였던 까닭이다. 까마귀들이 파먹은 자리에서 흘러 바닥에 고이고 대리석을 부식시키며 결국엔 사람 마시는 물까지 파고드는 바로 그 녹이야말로. 그러나 그는 굳이 이번만큼은 예외라 덧붙이지는 않았다. 한 번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하야 나온 즉석 처분까지의 기간, 100일.
바르바토스는 텅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병든 공기는 호흡할 때마다 폐 속 그득히 곰팡이를 채웠고, 잔 아래 조금 남아있는 단물에는 악의 가득한 버섯을 피웠다. 혀 아래 머금은 독으로 절망을 삼키고 소화시키며, 그는 서도윤이 이 장소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 기적이라 생각했다. 옅게 내리그어진 눈동자를 마주한다. 좋아. 선선히 떨어진 대답에 바르바토스는 아무런 반응도 내지 않았다. 상대의 물기 없이 건조한 목소리는 무미한 감정에서 우러난 탓이 아니라, 단순히 오래 말 꺼낼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 자명했다. 그는 말을 하기 위해 연 서도윤의 입 안에서 크게 베인 혀를 보았다. 피 냄새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깊고 오래된 상흔은 단지 어떠한 비유였으나, 시각으로 명명할 수 있는 감각이기도 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덜그럭, 다시 저들끼리 뭉쳐 모습을 바꾼 은빛이 묵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곰팡이와 녹과 고여 썩어버린 물이 서로 들러붙은 채 바닥으로 가라앉아 말끔한 공기만을 남기는 일련의 과정이, 느리지만 점차로 소음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분명 서도윤의 귀에도 들렸을테다, 아직 변화를 알아차리긴 어려울지라도. 바르바토스는 잠시 눈을 감았고, 티 테이블 위 어지러이 흩어진 글자들을 갈무리하여 읊을 즈음에야 다시 떠냈다. 팽팽하게 목을 잡아당기는 실이 목을 파고들어 기도를 갈랐으나 그는 굳이 호흡을 멈추지 않았다. 숨이 막혀 헐떡이며 죽어가는 사람이 사는 집에 옅은 햇빛이 찬장과 벽을 타고 그림자를 드리운다. 은화 하나는 꼭 잘라낸 절망 조금의 몫이었다. 곧 이 집안을 가득 채울, 잘 갈려 맨들거리는 희망이기도 했다.
찻물이 뜨겁게 속을 채우는 척 목을 타고 내려가다 위장까지도 닿지 못한 채 사그라든다. 인삿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온전한 사람을 흉내낸 괴물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진득히 녹아내린 우울이 발 끝까지 퍼졌다.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는 것들을 느꼈다. 그 익숙한 감각이 선득하니 충동을 부추겼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말을 건져올렸다, 우물에서 억지로 줄을 잡아당겨 물을 긷듯.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은 그 문장은 그렇게 어렴풋이 스친 웃음과 함께 목소리가 되어 티 테이블 위로 흘렀다.
잘 부탁하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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