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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light.

[엘너드] These.




Battle Scars - Lupe Fia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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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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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잠에 들어서도 완벽하게 깨어있는 의식은 사람의 정신을 좀먹었다. 꿈조차 꾸지 못하는 머리의 무의식을 헤집는 것은 벌레 한마리다.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 빠져 무의식이라는 안식에 발도 들이지 못하는 주제에, 그는 어느 날부턴가 눈꺼풀 안에서 환상을 보았다. 

  언듯 뜨인 눈에 처음 보이는 것이 총이었다. 제 손에 꽉 쥐어진. 낯설 정도로 뼈마디가 도드라진 커다란 흰 손이 검은 권총을 쥐고 있었다. 방금 방아쇠를 당긴 듯 주변엔 온통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 눈 앞에는 내찢겨진 남자의 다리가 부숴진 뼛조각을 내비치고 있고, 흐르는 피에는 투명한 뇌수가 섞여 끈적하게 발밑에서 밟혔다. 


  백일몽, 혹은 자각몽.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생생한 꿈속에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 남자를 죽였다. 갈색 머리카락에 또렷한 녹색 눈을 가진, 그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ㅡ 


  “…?” 


  띄워진 눈꺼풀에 흐린 상을 잡은 어느순간 그는 잠시 망설였다. 지나칠 정도로 생생한 감각이 귓가에 속삭이기를, 이것이 정말 꿈이라는 것이 맞을까, 하고. 후회를 종용하는 소리는 금세 메아리로 번졌다. 그저 현실이든 꿈이든,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망설였다는 사실 자체에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목구멍이 뜨끔했다. 

  이유를 찾아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는 것은 혼탁한 의식 속에서는 제법 힘든 일이었다. 

  아주 느리게, 정말로 느리게. 


  권총을 쥔 손을 내리고 안개가 껴 뿌연 시야너머 골목으로 돌아섰을 때 마침내 기억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온 정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을 가격했다. 숨이 막혔다. 찢겨나가는 고통이 기도를 꿰뚫었다. 권총을 떨어뜨리고 목을 부여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흔적조차 없는 상처쯤이야 어쩌면 무시 할 수도 있었을 테다. 다만 그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까닭은 한순간 느리게 들이쉰 숨에 섞인 혈향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닮은 것이 아닌, 온전히 레너드 레드너의 것이자, 또한 천천히 핏물에 침잠해 가던 그 녹색 눈과 흐뜨러진 갈색 머리카락이 눈꺼풀 아래 그리 똑똑히도 새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목이 뜯겨져나갔다. 참기에는 시뻘겋게 안쪽에서부터 꺾여버린 것이 너무나도 아렸다. 마침내 기어코 물어뜯는 짐승의 이빨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가 몸으로부터 떨어져나가 골목길을 굴렀을 때, 그렇게 생각했을 때. 



  퍼뜩 보인 것은 천장, 그것도 아주 높은 천장이었다.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흐르는 무정한 감각에 눈을 깜빡일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삶에서 처음 꾼 현실과 분간되지 않는 어느 꿈에서. 

그는 레너드를 죽였다.






0. 


다음날, 다른 이와의 대화는 짧았다.



  “아직도 꿈을 꾸고 싶어, 그대?”

  “…글쎄, 내가 앞으로 제일 처음으로 꾸게 될 꿈에… 무엇이 나올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서.”






0. 



“네가 내 길상천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었던 말은 다소간 섞인 농담조에도 불구하고 진심이었다. 

  꿈속에서 그가 죽음으로써 엘머의 행운은 그 자리에서 끝났었다.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 깨달았다. 그를 잃었다는 자체로 엘머의 성공은 처참히 짓밟혔다는 것 즈음. 다시금 돌아온 현실은 여전히 스페이드 A를 고스란히 내보였지만, 처음으로 꾼 꿈에서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 너는 어디에서든 내게 특별한 사람인 모양이군. 


 ㅡ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기에는 언제나 정적 속에서 철컥이던 그의 머리는 부적합했다. 손 안에서 굴리던 검은 룩이 바닥을 구른 것은 그 즈음이었다. 중독과도 같던 흑백에서 시선이 떨어졌다. 무서울 정도로 굳었던 무표정이 이제는 텅 빈 테이블 만을 향했다. 그리고 그 너머의 굳게 다물린 입매는 오로지 또렷한 녹빛으로 옅게 웃던 그를 생각하며 시시때때로 숨을 멈췄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내뱉고 들이쉬는 호흡에 그의 혈향이 섞였다. 목구멍이 저릿했다. 

  그때서야, 행운에 대한 그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을 더듬기를 몇 분, 혹은 며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되짚어본 머릿속에는 곳곳에 구멍이 나있었다. 제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멍하니 충격에 강타당해 그저 테이블만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처음을 많이 안겨주는 이였다. 기억의 일부를 처참히 부서뜨린 것도, 그리고 영원히 바라지도 못할 것이라 여겼던 꿈에, 죽어 나타나 그의 목을 조른 것도. 그만큼 살아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본 것마저 그가 처음이었다. 문득 굳게 다물린 입술 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산산조각난 그와 자신의 시간 조각들이 또렷하게 손 끝에 지근지근 밟혔다. 그는 언제나 입에 자신의 죽음을 담았다. 고장 나고 망가진 몸이라고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어서 몇 번이고 자신의 것을 가져가라 말했구나. 

  그것이 그렇게나 혐오스러워서 결국은 기억마저 지워버렸구나. 


  단순히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생각했던 스스로의 의미를 그렇게 짜 맞추며, 그저 엘머는 웃었다. 그것이, 레너드의 시간이 그렇게나 짧다는 것이 그렇게나 싫어서. 어떠한 종류의 강렬한 분노나 증오를 느껴본 적이 그 전에도 있었던가. 끔찍한 감각이 온몸을 불살랐다. 그리 새까맣게 타들어가면서, 언제 즈음에야 그에게 말해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무덤까지 가져가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분명히 그래야만 했다.




0.


 I Wish I never looked, I wish I never touched.

I wish that I could stop loving you so much.





0. 


  그럼에도 사람의 일이란 끝까지 모르는 것이라, 기어코 어느 새벽 저리도록 다디단 초콜릿 하나와 함께 삼켜야했던 말은 결국 내뱉어졌다.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진 당분 덩어리가 소름끼쳤다. 온몸의 감각이 그의 앞에서는 생생하여 곧즉 그 자체로 지옥이었다. 평소와 하나 다를 바 없이 미소짓는 것도, 농담을 던지는 것도, 숨을 쉬는 것마저도 전부 의식해야만 하는 생지옥.   

  와인잔을 손에 쥔 그의 시선이 의아하게 꽂혀왔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나를 제대로 태우고 있거든, 리샬.”



  같은 말을 반복하며 웃었다. 입술을 열고 목을 진동시키는 그 지극히 자연스러워야할 일련의 과정마저 하나하나 전부 제어해야한다는 것이 그저 끔찍했다. 

  그래서 밖으로 꺼내면, 이제 돌이킬 수도 없이 무너지고 나면. 


  “내 행운으로 점철된 핏덩어리가 고작 누군가의 존재 하나로 사해질 것이 아니란 것은 진즉에 알았어야했는데.” 


  목을 틀어막은 설탕덩어리가 지독히도 달았다. 쓴 와인 한모금과 뒤섞어 불속으로 떨어뜨리고 나서도, 도통 답답한 속은 풀릴 생각을 않았다. 여전히, 의문으로 점철된 시선이 날카롭게 와 박혔다. 


 차라리 총알로 꿰뚫어준다면 좋으련만. 

  다시 미소지었다. 


  “이렇게, 내가 너를 잃는 것으로 마저 그 대가를 채울 모양이야, 리샬. 너무나도 큰 대가가 아닐 수가 없군.” 


  어쩌면 그는 무언가 따지려 입을 열었던 걸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말할 틈을 주지 않았을 뿐이다. 엘머는 그저 평소처럼, 장난스레 입매를 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차라리, 총알로 꿰뚫어준다면. 




  “난 곧 부숴져 버릴거야. 떨쳐내는 것도 불가능하군. 그러니 이제 온전해야했을 네 시간 틈사이로 도망치도록. 그리고 명령을 내려. 

  내가 너를 사랑하지 못하게 말이야, 리샬.” 



  나에게 불을 붙인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네가 끝났다고 말할 때까지, 절대로 끝내지 못할 것 같으니. 




  “너를 사랑하고 있거든, 네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러니 어서 빨리 말해주기를. 뿌리치고 도망치기를. 나에게 끝을 고해주기를.

평소와 같이 장난기를 담아 휘어낸 눈의 꺼풀 너머로, 다시금 괴로운 환상이 시작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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