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 혼] 000. 키워드
- 빛이 없는 그림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고, 부드러워지기는 커녕 날카로워지기만 했다.
그 까닭에 그는 능력의 반절,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전부 잃어버렸다.
그림자로 둘러 깨끗하게 치료하는 법, 강한 태양빛을 가려 동식물을 보호하는 법, 물 대신 서늘한 그림자로 식물을 키우는 법, 안전하게 누군가가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법은 전부 빛과 함께 잊혀졌고,
그림자로 삼켜 녹여버리는 법, 꿰뚫고 짓찧어 고깃덩이로 만드는 법, 냉기로 얼려 죽이는 법, 영원토록 태양빛을 보지 못하도록 달라붙어 눈을 가려버리는 법 따위만이 남았다.
그가 다시 쪽지나 물건 정도는 녹이지 않고 품을 수 있게 되기까지만해도, 몇 억년이 걸렸다.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 삼켜지면 녹여버리는 그림자와 함께.
- 빛은 너무 밝아 너무 강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빛이 있었기에 그림자가 있을 수 있어, 빛이 먼저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로 곱디고운 누이였고, 생명이라곤 하나도 없던 뜨거운 불의 바다에선 단 둘 뿐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했다. 형체가 없을 때부터 함께, 인간이라곤 없을적부터 서로 모습을 빚어줄때도, 이름을 지어줄때도, 빛은 여전히 있었으나 '빛'은 죽어갈때도, 그들은 함께 있었다.
- 빛이 죽어 사라진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빛이 너무 밝아 너무 강한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그 까닭에 빛이 약해진 뒤에도 그림자는 여전히 너무 강했다. 남을 위한 능력의 반절도 강했으나, 남을 해하기 위한 능력의 반절도 너무나 강했다. 반면 전자는 의도해야 가능했으나, 후자는 의도치 않아도 가능했다. 맞닿을 때마다 집어삼켜지는 것을 빛은 알았고 그림자는 몰랐다. 본디 자신의 덩치는 자신이 모르는 법이니. 그림자는 단지 빛이 아픈줄로만 알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모를 수 있었으나. 파스스 자신의 손이 닿자마자 녹아 사라지는 빛에 결국은 모를수가 없었다.
새로운 신이 태어났으나 그림자와 연은 없었다. 그림자에게 빛은 '빛'이 아니었으니까.
- '빛'이 사라져 죽은 직후, 그림자는 바다로 갔다. 그리고 커다란 바닷속 동굴 하나가 부식 될 때 까지 그 안에 숨막혀 잠들어있었다. 죽을수는 없었지만, 반사적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 속에 물이 섞여들어오는 것은 분명히 고통스러웠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고, 그 일대 심해가 전부 썩어들어간 후에야 물에 풀려 사라진 태생의 잔혹함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때서야 뭍으로 밀려나올 수 있었다.
- 그림자는 죄책감에 가장 약하다.
- 빛이 몇번이고 바뀌는 동안 그림자는 한번도 바뀌지를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잘 몰랐다. 상해가 잘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몇백, 몇천년씩 걸리면서 이상하게 죽지를 않았다. 검은 피가 타르처럼 끈적하게 제 몸을 잠식해, 억지로 명을 붙들어두고 있음을 안 것은 그 일대 생명을 담당하는 신을 만나고 나서였다. 죽음이 간절하다면 차후 그는 다시 그 신을 만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토론하리라.
그는 아직 살고 싶었다. 파괴만을 남기고 떠나기는 싫다는 미련에서 시작된 것은 새로운 탄생과 발명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그는 자꾸만 발전하고 진화하는 인간들에, 요괴들에, 신들에, 그리고 문화와 세상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고, 좋아한다. 그 뿐이었다. 그래서 살고 있다.
- 그림자는 색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눈은 빛이 빚어주어 색을 가졌으나, 그 이외에는 전부 흑, 혹은 백 뿐이었다. 하얀 그림자, 검은 그림자. 그림자는 색을 꽤 좋아했다. 흑과 백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색을 조금 더 좋아했다. 그는 빛이 아끼던 색을 풀어 8개의 등불을 만들었고, 자신의 색을 풀어 2개의 등불을 만들었다. 그것이 그림자가 아직까지 가지고 다니는 10개의 등불들.
- 일기 쓰는 버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