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젤] 12 Seconds.
12 Seconds.
하수구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내 스스로에게서 나는 냄새라 하겠다. 떨어지는 말이 목, 동맥에서 가까운 질긴 피부를 찢어내고 파고든다. 심장이 뛰는 곳이니 문신을 새길까 했던 그 자리다. 피가 쏟아지는 환각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제 목을 틀어쥐었다. 피가 더이상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는다. 검은 인영들 사이에 서있는 그가 또렷하게 보였다. 방금 단두대날 보다도 날카로운 한 마디로 내 목을 내려친, 웃고 있는 그가 보인다. 정확히는 뒷모습이었다, 멀어져가고 있었으니. 피비린내와 독한 내음이 뒤섞여 머리가 아프다. 그 와중에도 눈은 무서울정도로 완전히 그의 등을 담아내고 있었다. 시야는 온전하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랬다. 사람이 목이 잘린 이후에도 몇 초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던가, 지금 나의 순간이 바로 그랬다. 바닥에 나뒹굴어져야할 목을 억지로 손으로 붙들고 버티고 서있는 이미 죽어버린 사형수의 마지막 순간. 언제 꺼져버릴지 모르는 의식이 깜빡였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똑똑히 들었어, 나의 잿빛. 성인이 된 이후 단 한번도 들리지 않았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네가 내게 필요한 것 같아? 그래, 물음을 가장한 단호한 선언이었지. 속삭이는 소리는 그의 말을 한번 반복하고 흩어졌다. 점차로 손 끝에서부터 몰려드는 감각이 있었다. 죄악에 가까운, 소리로 말하자면 침음에 가까운 감각이 나를 깨닫게 만든다. 이제 내가 볼 수 있는 현실은 없음을. 그레이, 내가 가지고 간 이름이었고, 나의 수많은 거짓들의 이름 또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잿빛을 싫어했으며 그는 나를 다시 흑과 백으로 되돌려 살게 만들었으나. 지금, 선명하던 시야를 가리는 회색이 있었다. 나에게만 보이는 그 거짓들이, 발 딛고 서있을 수 있던 현실이 뒷모습과 함께 멀어지자마자 우글우글 몰려나온다. 거칠게 떠드는 낮은 소리들이 뒤를 따랐으나 나는 듣지 못했다. 나의 뒤에는 그의 앞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서있었던가, 이미 불투명한 안개에 가려져버린 그들은 더이상 보이지 않으니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 역시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방도는 없었다.
머릿 속 무언가가 끊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뚝, 뚝, 뚝, 간격을 두고 연달아 울리는 그 소리는 시계 초침소리와도 닮아있었다. 남은 시간은 12초,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사람이 살아 숨쉬는 마지막 순간.
지팡이를 고쳐쥐었다. 겨눌 곳은 정해져있다. 10초, 한발자국,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 체셔. "
이름을 부르는데에 1초, 그리하야 남은 시간은 아홉번. 내 눈을 들여다보는데 여념이 없는 양 눈 없는 거짓 탓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나 멀어지지는 않았을텐데도, 나는 그가 걸음을 멈추었는지, 혹은 그대로 나아가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천천히 내 목을 감쌌던 손을 떨어뜨렸다. 머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는 시야가 들이닥치리라 생각했으나 결국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나 손에 고일 정도로 피가 넘쳐 흐르는데 어째서 나는 바로 잠들지 못하는지.
어느새 시끄러운 속삭임들 사이로 빗소리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악몽인가. 폐부로부터 쏟아져나오는 웃음이 있었다. 물기 하나 없는 공기가 요란스레 속을 채웠다가 내 입을 활짝 벌려낸다. 악몽이라면 다시금 다른 꿈 속으로 도망쳐버리면 그만이다. 이제 더이상 내가 서있을 현실은 없다. 나는 꿈과 현실을 오가지 못하고 무의식과 꿈과, 또다른 꿈을 찾아 헤맬테고, 영원토록 이 악몽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 그 말, 처참하게 후회해줘. "
나는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옆에 있을 듯, 제 마지막까지 함께 해줄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기반하여 살아남으라 말하던 그가 간절히도 돌아오지 않을 나를 바라기를 바란다. 가장 두려워마지 않던 죽음마저도 그가 내린 선언이라 달게 받을 터이니, 그 대신에. 네 마디로 이루어진 말은 네 번의 초침 소리를 앗아갔고, 손목까지 타고 올라온 강렬한 이기심이 호흡을 멈추었다. 나는 네가 언제든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내가 그랬듯이. 그러나 결국 마주친 그는 나의 머리를 잘라낼 사형 선고를 외쳤다. 스스로의 안이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지팡이를 들었다. 여전히 그는 수없이 몰려든 거짓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혹은, 그만큼 멀어진 까닭일지도 모른다. 알 방법은 없었다.
뚝, 뚝. 끊기는 소리가 두개골 안에서 두 번 더 울렸다. 지팡이를 든 손이 잘게 떨린 까닭이다. 떨림은 이내 멎었으나 대신이라도 하겠다는 양 눈 앞이 뿌얘질 정도로 회색이 가득 들어찬다. 시끄러운 속삭임에 귀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문득 눈에서 핏물이 흘렀다 생각했다. 이렇게나 죽어가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목에 절망하며, 결국 흘러내리는 이 물기는 핏자욱일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정확히 두 번의 울림만큼. 스스로의 머리를 겨눈 지팡이에는 망설임 하나 담겨있지 않았다. 어둠에 짓밟히기 위해 필요한 속삭임은 짧다.
마침내 시계 초침 소리가 멈추었을 때. 어디선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의 것이었을 나의 거짓이.
BGM . Mot - 당신의 절망을 바라는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