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는 달콤하고 빨갛고 파랗고 노랗지,
꽃잎들이 떨어지는 하늘을 본 적이 있나요.
공기가 달콤해 숨이 턱 막혔다. 처음 느껴보는 바다 향은 아침부터 입 안에 가득하던 피비린내와 다를 것 없었고, 뺨을 가르는 바람은 날카로와 시렸으며 물빛은 푸르고 짙어 눈이 감겼다. 번쩍이는 플래시 불빛이 어지러워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지끈거리던 머리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낯익으나 이름을 알수 없는 기계덩어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사람들이 많았다. 제게 익숙한 이름들을 부르며 처음 보는 어른들이 울고, 웃으며 달려왔다. 아, 이들의 가족인가. 제 뒤에 숨어 빼꼼이 바깥을 내다보던 작은 왕자에게도 사람들이 달려왔다. 옆으로 비켜섰다.
별다른 감흥도 없었고, 재미도 없었다. 그저 그대로 행동하면 그 뿐이었지만, 자리에 멀거니 서있는 이방인은 번쩍 번쩍 터지는 불꽃을 피해 눈을 감는 것 마저도 벅찼다. 오늘 아침, 손에 천을 감고 혀를 물었을 때 잠들었어야했는데. 며칠 간 이어진 감정 소모의 끝자락에 선 그는 더 이상 혼란을 입 속으로 우겨넣는데에 지쳐버렸다. 아직 반절 넘게 제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십팔세기 중엽의 어느 조그만 국가는 현실과도 같던 상상을 넘지 못했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할렘가 한 구석의 고아원은 그 안에 누가 있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다지도 커다란 현실이 되어버렸다. 목적을 잃은 혁명가는 횃불을 들 이유도 찾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서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람을 죽인 목적은 고작 누군가를 가려주기 위해서였다. 알량하기 짝이 없는 변명거리였지만 없는 것 보단 나았었다. 깨질듯한 두통을 가져다 준 아스팔트 건물에서 벗어나 배를 타기 위해 이곳에 서있는다. 그 이상을 내다볼 수도, 이 이상을 계획할 수도 없었다. 낯설기만 한 광경에 기억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소녀의 배를 갈랐던 감각이 손 안쪽으로 저릿했다. 분명 밖으로 나서면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었다. 집사 카페, 신문을 뒤적거리는 상상은 고작 몇 초 후, 의미조차 갖지 못한 하릴 없는 망상이 되어 다시금 어디론가 가라앉아 사라졌다. 혹은 자수. 그래, 이곳에는 경찰도 있었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경찰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그렇게 말하는 상상을 했다.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죄책감 없이 반성조차 하지 않을 자수가 가지는 목적성은 없다.
과거의 횃불을 든 혁명가는 살아가는 이유도, 머리를 조아리는 이유도, 죽음을 택하는 이유도 분명했다. 그리고 온전한 그였다면 분명, 이곳에서 살아남으려 들었던 이유도, 나가려하는 이유도 확실했을 것이다. 눈 앞에 자신이 자신의 죽음으로 쟁취한 새로운 눈물과 피의 날들을 마주하고자 했을테다. 지금의 그는 어떠한가. 작은 아이들이 속살거렸던 자유로운, 멋진 신세계. 저가 밖으로 나가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가져다놓은 그 자유가 눈 앞에 들이닥칠까. 그 날카로운 함성을 코로 한가득 들이마시고 나면, 저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저 난생 처음 느끼는 아름다움은 너무나 뜻밖일테고, 저가 상상하던 바로 그것의 곱절만큼 더욱 커져 있을 것이다. 이방인을 위한 신세계가 아닌 곳에, 어중간한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쉬이 질식할 만큼 물들어버리고, 젖고, 한아름 짓무르다 무너질터이다. 손 안이 저릿했다. 그의 목을 꿰뚫던 나이프의 감각이 잊혀진 작은 소녀의 맥박과 뒤섞여 손 끝이 덜덜 떨렸다. 머리가 아팠지만, 주변에 벽은 없었다.
모두가 조금씩 배로 향한다. 웃음 소리,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 걱정하는 소리, 울음 소리. 그것은 몇등분이고 난 감정들의 토막이었다. 딱딱한 한 덩어리로 뭉쳐져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도록 틀어막힌 것을 꺼내기 위해 그는 저도 모르게 피비린내 나는 제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헛구역질과 동시에 웃음이 났다. 그것은 귀에 들리는 것과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면서도 그 겉은 그럴싸해서 제법 만족스러웠다. 사방에서 터지는 불꽃들과 함께 배로 걸어가며, 그는 그렇게 웃었다. 달큰한 공기에 코 끝이 시큰거린다. 무언가를 쥐듯 주먹을 쥐어보았다.
우선, 눈 앞에 놓인 그 저릿한 자유를 마음껏 들이쉬자. 그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멋진 신세계를, 질릴 만큼 품에 가득, 정말 가득 담자.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을지, 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몇 초만에 폐가 비명을 지르며 애써 넘긴 산소를 밀어낼지도 모르고, 어쩌면 며칠은 천천히 썩어가면서도 그렇게 황홀경에 취해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마침내 그 숨막히도록 달디단 공기에 더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불을 찾을테다. 불을 찾아, 손에 들고, 눈 앞에서 사그라진 언젠가의 눈물의 날을 상상하며, 망상하며, 그 허상을 좇아 제 몸 가득 싹을 틔워야지. 잿더미가 되고나면, 그 가루 하나하나 그러모아 싹트지 않을 씨앗 하나 심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러고나면, 더이상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품지 않아도 될테다. 더이상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고,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몸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하루 빨리 쉬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망가진 폐를 끌어안고 횃불 속에서 잠들고 싶다,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숨을 쉬어, 숨을.
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멈추었던 숨을 풀어놓았다. 쓰디쓴 맛이 제 혀 끝에서부터 단 공기에 섞여들었다. 한숨처럼 신음소리가 새었다. 이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그의 못된 인연들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이내 튀는 불꽃 속으로 잦아들었다. 그 뒤를 따르며 그는 모자를 고쳐썼다. 옷자락을, 눈을, 손을, 팔과 다리를 태울 불꽃을 상상한다. 바다 건너로 나아갈 이유가 있다. 숨이 참으로 달았다. 언제 멎을 지 모르는 그 호흡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그는 바닷가에서 마지막 달큰한 향을 삼켰다.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웠던 적 있나요.
연극 나쁜 자석, 작은 씨앗.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덴젤] 002. (0) | 2018.01.16 |
---|---|
[덴젤] 001. (0) | 2018.01.15 |
[휘 혼] 000. 키워드 (0) | 2017.02.13 |
[김제진] 002. Colorful (0) | 2016.02.14 |
[니플헤이머] 005. 질문 (W. 모스) (0) | 2016.02.14 |